언론보도
[춘천사람들] 사라진 다리 - 모진교
작성자관리자
등록일2020-12-29
조회690
[춘천사람들] 사라진 다리 - 모진교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춘천은 예로부터 물의 도시였다. 두 개의 큰 물줄기가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고 비옥한 농지를 제공하는 등 혜택도 주었지만, 배를 이용해야 건널 수 있었기에 지역민들의 삶엔 불편함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나루터가 있던 곳에 근대적인 교량이 하나둘 개설된다. 1929년 공지천교를 시작으로, 1930년 신연교, 1933년 소양교, 1934년 모진교가 차례로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 양구 등 영서 이북을 연결하는 도로 교통망이 완성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춘천에는 3개의 커다란 댐이 건설된다. 댐의 건설은 지역민들의 삶만 바꾼 것이 아니다. 춘천에서 화천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바뀌었다. 사북면 원평리와 인람리 사이 북한강을 가로질러 가설되었던 모진교가 1965년 춘천댐이 완공되면서 호수속으로 잠긴 것이다. 모진교를 건너 인람리를 지나 고탄을 거쳐 춘천으로 들어오던 기존 도로는 춘천호 담수로 인해 일부가 폐쇄되고, 춘천호 옆 오월리의 가파른 절벽을 깎아 새롭게 도로가 개설되었다.
개통 당시 모진교 전경
출처=1934년 12월 10일 조선신문 기사
모진교를 기억하는 세대는 지금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모진교는 해방 이후 남과 북을 가른 38선 경계선이었으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이 다리를 넘어 남침하였고 훗날 우리 국군 역시 이 다리를 건너 북진하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춘천과 영서 이북을 연결시켜 주던 모진나루터가 그곳에 있었다. 여말선초 운곡 원천석이 쓴 시에, ‘이 물이 어머니의 달콤한 젖이 되어 어미 잃은 불쌍한 이들을 잘 키워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미나루[母津]’라는 의미로 명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루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저마다 다른 속사정이 있었겠지만, 떠나가든 돌아오든 언제나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히 반겨준 곳이 바로 모진나루터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은 모진(茅津), 또는 모진(牟津)이라 불렀고, 모진(暮津)이란 표기도 보인다. 험준한 산 사이로 흐르는 북한강에 위치하였기에 물빛에 산빛이 더해져 짙푸른 색을 띤 강물에 착안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지역민의 증언에 따르면 모진교는 상판만 제거된 채 교각은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화마속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모진교가 춘천호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1948년 38선에 배치된 미군 장교와 모진교
출처=춘천문화원 편, 《3일간의 방어》
소양호에 유람선과 여객선이 떠다니고, 의암호에 카누 뱃길이 조성된 것에 비해 춘천호에는 배를 활용한 유락시설이 전혀 없다. 사시사철 빼어난 춘천호의 주변 경관을 볼 때마다 아쉬운 마음에 모진교를 복원하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 예전처럼 차량이 통행하는 정식 교량으로 복원하기는 힘들지라도 춘천호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개발한다면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춘천댐 언저리까지 가설된 호반자전거길과 연결한다면 춘천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배로 건너던 모진나루가 자동차들이 오가는 모진교로, 다시 자연을 즐기는 여행객들을 위한 첨단 다리로 바뀌는 것도 시대상을 담은 작은 역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형태나 용도는 바뀌더라도 오가는 이의 안녕을 빌던 포근한 어머니 품속이란 의미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출처 : 《춘천사람들》 - 시민과 동행하는 신문 (http://www.chunsa.kr)
관련링크: http://www.chunsa.kr/news/articleView.html?idxno=50327